세시간 정도 잤을까? 핸드폰 알람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 7시까지 해남 어란진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새벽 3시에 알람을 맞췄다. 주섬주섬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아직 고요한 새벽거리로 섰다. 어란진은 반도의 끝 해남에서도 땅끝쪽에 있기 때문에, 광주에서 출발해도 넉넉히 3시간이 걸린다. 어란진 어민들은 아침 7시정도면 배를 몰고 김을 메러 나간다. 새벽을 뚫고, 한참을 달려 해남...반도의 끝에 수려한 봉우리를 이룬 달마산의 새벽녘 그림자가 멋있다. 어촌계장님은 아침 일찍 어촌계 사무실에서 업무에 바빴다. 도착하자 마자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소개해주신 어민의 배를 함께 타고 바다로 나갔다.

어란진의 새벽

어란진의

<어란진의 새벽>

바다쪽이라 날씨가 더 춥게도 느껴졌지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니 체감온도는 거의 영하였다. 아차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따뜻하게 입고 올건데...다행히 어르신이 챙겨두신 장갑을 건네신다. 캠코더를 들고 있는 손이 무뎌질까 걱정을 했지만, 작업장갑 두께라서 그런 걱정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는 배에는 약 3~4명 정도가 탄다. 배는 김발의 폭에 맞춰서 제작되었다. 자신의 김발이 있는 곳으로 가면 갈고리로 김발을 엮은 줄을 끌어올려, 김발을 배에 태운다. 그리고 배위에 만들어진 김을 훑는 기계를 돌리며 배를 앞으로 운행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김발 밑으로 배가 운행을 하게 되고 기계 밑에 만들어진 바구니에 김이 훑어진다. 보통 배에 만들어진 바구니를 가득 채우려면, 적으면 7개 많으면 10~11개 적도의 김발을 훑어야 한다. 김발을 훑는 양은 김이 얼마나 잘 재배되었는가에 따라 틀리다. 김을 계속 훑으며, 손으로 만져 품질을 검사하고, 여기저기 끓어진 김발을 고친다. 약 1시간 가량 김을 훑었을까? 바구니가 가득차자 배는 다시 어란진 항구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배를 이용해 김을 메는 모습>

<광활한(?) 김발들>

다른 배들도 거의 작업시간이 비슷비슷했다. 그도 그럴것이 김을 훑는 배들은 거의 구조나 모양이 비슷하고, 보통 한사람당 많게는 100주(젊은 사람들은 100주 정도를 재배한다. 1주는 김발 1개, 길이 약 110m이다. 그러나 100주를 재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에서 적게는 50주 정도의 김을 재배한다. 김을 많이 재배하는 사람들은 일꾼을 쓰는데, 김을 멜때만 쓰는 경우도 있고, 김을 메고 난후 어구를 손질하거나 그외 다른 일을 위해서 1년내내 일꾼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란진 항구에 들어온 배는, 방금 훑어온 김을 한바가지 담아 위판장 앞에 둔다. 위판은 보통 11시쯤에 한다. 위판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조금 있으니 위판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먼저 추첨을 통해 위판 순서를 정한다. 위판은 어란진 수협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추첨을 통해 위판순서가 정해지면, 순서대로 줄을 선다. 위판원이 번호순대로 놓여진 김을 위판대에 뿌리면, 경매인들은 김의 질을 평가하여, 값을 정한다. 어민들의 말에 의하면 올해는 김이 많이 안 나와서 1부대에 많게는 5만원정도까지 값이 나온다고 한다. 12월달에는 최고 7만원까지 값이 나왔다고 한다. 보통 아침에 작업해온 김의 양은 50~60부대 정도 되는데, 하루에 많게는 250만원에서 300만원가량의 돈이 생긴다. 하지만 어구를 매번 손질해줘야 하고 일꾼을 쓰는 사람들은 품삯도 줘야 하기때문에, 얼마 남지는 않는다고 한다. 왁자지껄하게 위판이 끝나자, 항구에 트럭들이 정차하고 크레인으로 위판한 김들을 트럭에 싣는다. 이 작업은 오후 2시정도까지 이어졌다.

<김을 위판하는 모습>

<위판한 김을 크레인을 이용해 트럭에 싣는 모습>

김을 트럭에 싣고 난 후, 우리와 함께 바다에 나갔던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예전에는 삼치잡이 어선의 선장을 하시다가 김을 한지는 약 20년이 된다고 하셨다. 어란진은 약 20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어촌계의 통제아래 어장이 나눠지고, 어민들은 각 반에서 어장을 나눠 김을 재배하고 있었다. 각 반마다 추첨을 통해서 어장을 매년 바꾸너나, 영구히 재배할 것인지를 정한다고 한다. 90년대 초, 인근 진도에서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진도는 김을 재배하지 않기 때문에 인근 진도해역까지 김어장을 설치하여 김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진도에서 김어장 사용료를 내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한참 시끄러웠지만, 지금은 해결되어 진도해역 어장을 사용하는 어민은 1년에 11만원의 사용료를 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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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에 일어나, 해남 땅끝 근처의 어란진까지 갔다. 그리고 김메고 위판하는 것까지 보고 왔다. 200여 가구가 살고있는 어란진은 어촌계를 통해 운영되고 있었다. 갈때 3시간, 올때 3시간 운전하시느라 무지 고생하신 선생님...는 옆에서 열심히 졸았다...ㅡㅡ;;; 죄송할 따름.....

그리고 세상에 맛있는 회까지 사주시고...감사할 따름이다...

어란진 김메는 이야기는 내일~~다쉬~~~!! (피곤해서...^^;;;) I'll Come back

P.S. 착각하지 마시길...여기서 김메는 것은 바다에서 나는 김을 수확하는 것을 말한다. 난 절대로 밭에 난 잡풀들을 뽑고 온 것이 아니다~~!! 내일을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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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을 둘러본 후 월출산을 바라보며 강진으로 향한다. 강진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홍준 교수의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남도답사 일번지 그렇지만 이것말고도 많은 문화유산들이 강진땅에 있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강진 무위사.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무위사는 정말 호젓하고 조용한 사찰이었다. 찾는 사람이 몇 이나 있었을까? 조용한 사찰 안에는 버드나무가 휘날리고 있었고, 늙은 백구 한마리가 찾아오는 객(客)은 아랑곳하지 않고 극락보전 앞에 누워있곤 했다.

하지만 무위사가 너무 유명해져 버려 이젠 그런 모습도 볼 수 없다. 항상 사찰을 가면 드는 생각이지만,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예전의 호젓함은 없어져버리고, 여기저기 건물들이 들어서 예전의 멋을 잃어버린다. 무위사도 마찬가지로 예전의 호젓함과 멋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무위사에 가면 유명한 것은 극락보전과 극락보전 후불벽화 뒤에 그려진 수월관음도이다.

극락보전은 그리 크지도 않은 아담한 건물이지만 단아한 맛배지붕과 공포들이 우리 건축의 멋을 잘 함축하고 있는 건물이다. 극락보전에는 많은 벽화들이 있었는데, 보수공사시 떼어내 벽화보존각에 전시해오다 요즈음 새로운 건물을 지어 벽화를 전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위사 후불벽화 뒤로 돌아가면 버드나무와 정병을 들고 물 위에 있는 관음도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뒤에 관음도가 그려져 있는지 모르고 극락보전만 보고 간다.

극락보전을 오면 극락보전 왼쪽으로 비가 하나 서 있다. 선각대사 편광탑. 이것은 고려시대 승려인 형미의 부도비이다. 그런데 어디를 찾아봐도 형미의 부도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형미의 부도가 개경 오관산 태안사에 있기 때문이다. 원래 부도와 비는 함께 있어야 하지만 따로 있다. 쓸쓸히 혼자 있는 비는 오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서 있다. 형미는 태조왕건에서 왕건을 비호하다 견훤에게 죽은 승려이다. 왕건은 형미의 도움으로 강진지역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왕건 사후 강진지역 호족들에 대한 정치지배력이 약해지자 다시금 강진 무위사에 형미의 비를 세워 강진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끌어들일 요량으로 세운것이다.

강진 무위사를 둘러보고 무위사 뒤쪽으로난 도로를 넘어가면 설록차 강진다원을 만날 수 있다. 보성만큼 넓게 펼쳐져 있지는 않지만, 몇 분동안의 녹차밭 드라이브는 강진을 찾은 사람들에게 숨겨둔 보물을 보여준 것처럼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한다.

녹차밭을 넘어 찾은 곳은 월남사지. 월남사지에는 특이한 탑이 하나 있다. 그 탑 덕분에 모전탑이다 그냥 탑이다 얘기가 많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냥 탑으로 지정이 되었다. 탑 주위에서는 아직도 사찰이 존재했을때 썼음직한 석재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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