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 교련선생과 선도부 - 어두운 군사정권의 그림자
대한민국 학교 좇까라 그래! 현수의 발악같은 한마디는 지금도 유효하다. 1978년과 지금이 틀린것은 깡패같은 선도부와 교련선생이 없다는 것 뿐! 학생들의 개성을 파괴하는 교복은 여전히 존재하고, 한참 멋을 부려야 할 남학생들은 파르라니 머리를 갂아야 한다. 아직까지도 교복과 두발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학력을 통해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복과 두발의 자유를 뺏음으로서, 한참 개성을 발휘하고 발랄할때의 꽃다운 젊음을 공부에 투자해야 한다.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깡패같은 선도부와 교련선생은 없다는 것이다.
교련선생은 7~80년대 90년대초까지 일선 고등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담당하던 교사이다. 교사라고 하지만 일반 군대에서 교육을 받은 군인이었다. 이들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군사교육 및 사상통제를 담당하였다. 그럼 교련선생이 왜 고등학교에 나타났는가? 이것은 베트남전쟁과 푸에블로호 사건, 김신조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보내며,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반공의 국시를 공고히 하던 박정희에게 김신조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은 미국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만든 사건이었다. 김신조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이 요원 31명을 침투시켜 청화대 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1968년 1월 21일) 이들은 세검정까지 진출했다가 1명이 생포되고 나머지는 전원 사실되었다. 생포된 김신조는 전국에 생방송된 기자회견에서 남파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 고 말해 충격을 더해 주었다. 박정희로서는 당연히 북한을 응징하기를 바랬고, 미국이 이를 지원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1968년 1월 23일, 북한이 미국의 최신예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포하면서, 박정희의 계획은 꼬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68년 가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여론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고, 베트남과 한국에서 2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북한과 단독으로 회담에 나섰고, 10개월에 달한 협상끝에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시인하고 이에 사죄했으며, 북한은 12월 23일 82명의 생존승무원과 시체 1구를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이 사건을 통해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에 들어가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병영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물론 미국은 박정희를 달래기 위해 한국에 추가 군원 1억달러를 제공하고, 한국 공군에 팬텀기를 제공하는 한편 3선개헌 시도를 묵인했지만, 이런 행동은 박정희의 불안감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후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현역들의 복무기간을 6개월 연장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새로운 주민등록 제도를 도입하여 18세이상 전국민의 지문을 담은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였다. 외적인 통제뿐 아니라 내적인 통제까지 하려 했던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다. 박정희의 작업은 전국민의 외적, 내적 통제를 통해 전국민이 군인이 되는 군대같은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제 목요일이면 교련 조회를 통해 사열과 분열 행진을 하게 되었고, 두발검사, 복장검사를 당해야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나타난 교련선생과 선도부는 당연히 학교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깡패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권력의 힘은 컸다. 영화 장면 중 장군의 아들인 성춘이에게 말을 건내는 교련선생은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다. 선도부장으로 나오는 종훈도 마찬가지다. 눈에 가시같은 우식이가 없어지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학생들을 깨부시기에 열을 올린다. 결국 깡패 교련선생과 선도부는 박정희가 만들어낸 어두운 군사정권의 사생아였고, 학교내에서 폭력과 권력을 통해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는다. 사실 모든 것에 순응하고 조용하게 지내는 현수같은 학생에게 이소룡은 깡패 교련선생과 선도부로부터 구해 줄 구세주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제 고등학교에는 깡패 같은 교련선생과 선도부는 없다. 하지만 교련선생과 선도부의 자리를 매운것은 몰지각한 학부모들의 치마바람과 일류대를 향한 쓸데없는 의욕들, 개성강하고 활발한 학생들을 밤늦게까지 잡아두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교육, 권력에 눈먼 교육자들이다. 그래서 아직도 대한민국의 학교는 좇까고 있는것이다.
참고
제 46회 전국역사학대회 / 한홍구 (베트남 전쟁과 한국의 병영국가화)
말죽거리 잔혹사 홈페이지

교련선생은 7~80년대 90년대초까지 일선 고등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담당하던 교사이다. 교사라고 하지만 일반 군대에서 교육을 받은 군인이었다. 이들은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군사교육 및 사상통제를 담당하였다. 그럼 교련선생이 왜 고등학교에 나타났는가? 이것은 베트남전쟁과 푸에블로호 사건, 김신조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보내며,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반공의 국시를 공고히 하던 박정희에게 김신조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은 미국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만든 사건이었다. 김신조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이 요원 31명을 침투시켜 청화대 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1968년 1월 21일) 이들은 세검정까지 진출했다가 1명이 생포되고 나머지는 전원 사실되었다. 생포된 김신조는 전국에 생방송된 기자회견에서 남파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 고 말해 충격을 더해 주었다. 박정희로서는 당연히 북한을 응징하기를 바랬고, 미국이 이를 지원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1968년 1월 23일, 북한이 미국의 최신예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포하면서, 박정희의 계획은 꼬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68년 가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여론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고, 베트남과 한국에서 2개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북한과 단독으로 회담에 나섰고, 10개월에 달한 협상끝에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시인하고 이에 사죄했으며, 북한은 12월 23일 82명의 생존승무원과 시체 1구를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이 사건을 통해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에 들어가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병영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물론 미국은 박정희를 달래기 위해 한국에 추가 군원 1억달러를 제공하고, 한국 공군에 팬텀기를 제공하는 한편 3선개헌 시도를 묵인했지만, 이런 행동은 박정희의 불안감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후 박정희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현역들의 복무기간을 6개월 연장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새로운 주민등록 제도를 도입하여 18세이상 전국민의 지문을 담은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였다. 외적인 통제뿐 아니라 내적인 통제까지 하려 했던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다. 박정희의 작업은 전국민의 외적, 내적 통제를 통해 전국민이 군인이 되는 군대같은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제 목요일이면 교련 조회를 통해 사열과 분열 행진을 하게 되었고, 두발검사, 복장검사를 당해야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나타난 교련선생과 선도부는 당연히 학교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깡패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권력의 힘은 컸다. 영화 장면 중 장군의 아들인 성춘이에게 말을 건내는 교련선생은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다. 선도부장으로 나오는 종훈도 마찬가지다. 눈에 가시같은 우식이가 없어지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학생들을 깨부시기에 열을 올린다. 결국 깡패 교련선생과 선도부는 박정희가 만들어낸 어두운 군사정권의 사생아였고, 학교내에서 폭력과 권력을 통해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는다. 사실 모든 것에 순응하고 조용하게 지내는 현수같은 학생에게 이소룡은 깡패 교련선생과 선도부로부터 구해 줄 구세주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제 고등학교에는 깡패 같은 교련선생과 선도부는 없다. 하지만 교련선생과 선도부의 자리를 매운것은 몰지각한 학부모들의 치마바람과 일류대를 향한 쓸데없는 의욕들, 개성강하고 활발한 학생들을 밤늦게까지 잡아두게 만드는 비효율적인 교육, 권력에 눈먼 교육자들이다. 그래서 아직도 대한민국의 학교는 좇까고 있는것이다.
참고
제 46회 전국역사학대회 / 한홍구 (베트남 전쟁과 한국의 병영국가화)
말죽거리 잔혹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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