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없이 대답 한 번으로 떠난 길
여행은 계획없이, 생각이 들었을 때 짐을 싸서 떠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을지 무엇을 볼 지 막연한 기대감과 자기도 모르게 떠 오르는 두려움에 마주설 때, 그리고 기대감과 두려움이 한번에 교차될 때의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 인지 모른다.
이번 지리산 둘레길 여행은 계획도 없었고, 한번의 주저함도 없었다. 얼마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저없이 떠났다.
7월 23일(토) 새벽 2시 30분, 한참 자야 할 시간에 주섬주섬 일어났다. 짐도 챙기고, 그동안 묵혀놓고 못 입었던 등산복도 꺼냈다. 지리산 둘레길을 간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코스일지, 어디로 갈 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짐을 챙겨 집을 떠난다.
새벽길을 걸으며, 문득 한참 조사 다닐때가 생각났다. 목적지만 알고,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새벽에 집을 나와 차에 몸을 실었던 그때. 때로는 어르신의 재밌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때로는 너무나 시시하게 다시 돌아와야 했던 그때는 나도 모르는 뭔가에 씌인듯 자꾸 떠나고 떠나고 떠났다.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생활 5년차에 목적지만 알고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은 없어졌고, 혼자 떠나고 싶어도 어딘지 모르게 스물스물 올라오는 두려움에 마음을 억누르고 억눌렀다.
차를 몰아 지인과 약속한 장소에 다다랐다. 이제 출발! 지인은 경남 산청을 목적지로 말한다. 다행히 1박 2일 때문에 유명세를 탄 지리산 둘레길이 네비게이션에 나온다.
새벽이 차츰 걷히는 서울을 벗어나 아래로 아래로 차를 몬다. 모든 것이 아직 조용한 시간. 나와 지인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만 들린다. 한참을 달려 주위에 빌딩보다 산과 나무와 들판이 많이 보이고 이내 산이 높아질 무렵 경남 산청군 수철마을에 도착했다. 아침 8시. 농촌의 아침은 새벽부터 시작되지만, 아직 마을은 조용하다.
자! 이제 걸어볼까?
쥐죽은듯 조용한 마을에 도착하여 짐을 챙겨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섰다. 현재 우리 위치를 확인하고 자! 이제 걸어볼까? 이제 시작한다. 두려움과 설레임이 함께 교차하며 마을을 들어선다. 아침 일찍 부터 나와 있던 마을 어르신이 말을 건다. 이쪽으로 가심 됩니다~ 어디서 오셨는겨? 서울에서 왔습니다. 방금 서울에서 오신 두 분 이쪽으로 넘어 갔습니다. 이쪽으로 가심 됩니더! 아! 감사합니다.
방향을 잡고 길을 걷는다. 논에 벼들은 여름이 깊어짐에 녹색으로 물들었고, 졸졸 거리는 시냇물이 귀를 간지럽힌다. 논과 논 사이 길을 걸어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이웃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주위에 산 밖에 없는 마을은 산 아래 아늑한 곳에 푹 들어앉아 아침을 맞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녹색. 들리는 것은 졸졸거리는 시냇물. 다시 길을 재촉한다. 제법 오래된 나무가 낭떠러지에서 아슬아슬하게 뻗어 땅을 굽어보고 마치 대문을 형성한 듯 우리를 맞이한다.
길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도시에서 들리던 경적소리, 싸이렌 소리보다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편하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길을 걸으며, 이것은 콩, 이것은 호박, 이것은 옥수수. 논 과 논 사이 그리고 논이 들어앉은 비탈면에도 콩을 심어놨다. 참! 어르신들 부지런하시다. 논두렁도 비탈면도 가만 두지 않으셨다. 콩으로 옥수수로 면을 채웠다. 주위에 가파른 산 밖에 없는 이곳에서 땅 한데기가 얼마나 소중하며, 먹을거리가 얼마나 소중할 것인가. 이미 비탈면에 심어놓은 콩과 옥수수가 생명과 삶의 소중함을 넌지시 얘기한다.
한참을 걸어 현재 위치를 살펴보니 평촌리와 대장마을 사이인 듯 하다. 배낭을 벗고 정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걸었더니 발바닥이 뜨겁다. 살살 녹은 얼음물에 목을 축이고, 공기를 들이 마신다.
햇볕이 나지만 구름에 가려있고, 산들바람이 시원하여 걷기 참 좋다. 땀이 좀 마를 무렵.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재촉한다. 약간 구릉진 곳에 위치한 마을을 벗어나자 이내 도로가 보이고 졸졸거리던 시냇물이 이내 물소리를 높인다.
경호강이 눈에 들어온다. 강변에 텐트를 치고,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인다. 길은 경호강을 옆에 두고 우리를 안내한다. 물소리는 갈수록 깊어지고, 이내 큰 강을 만나 소리를 낮춘다.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질 무렵, 옆으로 트레킹과 펜션들이 보이고 이내 도로가 나온다. 잠깐 동안 이 길이 맞나 하고 헷갈릴 무렵 도로 표지판을 보고 방향을 잡는다.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건너 내리로 들어서는 길. 도로가 한참 이어진다. 강은 계속 우리를 옆에 두고 따라온다. 도로는 트레킹 보트를 나르는 차들, 트레킹을 즐기로 온 사람들을 나르는 차들로 정신이 없고, 강에서는 구호 소리와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함께 즐긴다. 재밌겠다. 우와 저거봐! 한참을 바라보다가 길을 재촉한다. 도로에서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고 강은 아까보다 더 가까워진다. 여전히 트래킹하는 사람들도 강은 쉴새가 없지만, 강물소리는 여전히 즐겁다. 강을 두고 걸어걸어 내리한밭으로 들어서기전 자그마한 컨테이너 박스 매점이 눈에 뛴다. 잘됐다. 쉬고 가자. 매점에 들어서 일단 점심 겸 찌지미와 막걸리를 시킨다. 매점을 지키는 젊은 아가씨 둘이 정신이 없다. 트레킹 하러 온 사람들이 들락날락 들락날락!
지인과 마주보고 앉아 막걸리 한 사발을 기울인다. 이것저것 그리고 오늘 걸은 길도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한다. 이내 막걸리 한 주전자에 두부 김치 추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것도 좋다! 어차피 계획도 없었다. 이 순간을 즐기자.
언뜻 취기가 올라오고 혀가 꼬이려는 찰라! 시간을 확인하고 짐을 챙긴다. 자 다시 길을 재촉하자. 컨테이너 매점에서 나와 다시 방향을 잡는다. 여전히 강은 우리 곁을 흐르고 방향을 잡아 들어서니 산길이 나온다. 오랫동안 아스팔트와 시맨트 바닥만 걷다보니 반갑기도 하지만 다시 시멘트 바닥이 나온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고즈넉히 바라본다
입에서는 막걸리 두 주전자에 트름으 나오고 여전히 강쪽에서는 트레킹 온 사람들의 구호소리가 메아리 친다. 내리한밭을 넘어 바람재를 넘었을까? 아! 보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작지만 아늑한 계곡!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발을 벗고 계곡에 발을 담근다. 이내 찌릿한 차가움이 가슴을 찌른다. 계곡에 발 담궈 본 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계곡 물 소리에 취하고 찌릿한 계곡물에 취하고 살랑살랑한 숲 바람에 취해 고즈넉히 아무말 없이 계곡에 잠긴 발을 응시한다.
시원하다. 좋다. 좋은 말만 나온다. 담궜던 발을 햇볕에 천연 온돌이 된 바위에 찍어 말리고 주섬주섬 신발을 신는다. 뜨거워졌던 발이 이내 시원해지고 한결 걷기가 편해진다. 풍현마을로 들어선다. 흙길과 시멘트길이 나타나고 없어지고 걷고 걷다가 고즈넉히 들어 앉은 대나무 숲을 만났다. 그리고 이내 대나무숲과 숲 사이에 푹 들어앉은 논이 눈에 들어온다.
야! 정말 이 논 좋다. 어쩜 이렇게 아늑하게 들어 앉았을까? 이 논 주인이 참 부럽네 하고 감탄에 감탄을 쏟아낸다. 너무 포근하게 들어앉아 있어 일을 해도 피곤할 것 같지 않은 그 논을 못내 아쉬어하며 뒤로 하고 내려서니 다시 길이 넓어진다. 넓은 시멘트길이 나타나고 경호강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지만 물소리와 트레킹 구호소리는 끊임없다.
한참을 걸으니 비가 후두둑! 어이쿠! 이럴줄 알았다 하는 순간 비가 멈춘다. 마치 옆 집에서 물을 뿌렸는데 잠깐 물이 튄 정도 비가 내린 것. 참 웃기네. 길을 걸어서 아침재 입구로 들어선다. 이제 숲길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 숲길을 벗어나면 어천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컨테이너 매점에서 3시간을 노닥거리다 보니 아침재 입구에 들어선 시간이 5시. 급하게 길을 재촉한다. 산길이 그리 험할것 같지는 않지만 막걸리 두 주전자에 무거운 발에 땀이 후두둑 떨어진다. 산길은 끝날 듯 내려갈듯 다시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진다. 가다 서다를 2~3번 이제 길이 끝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산길을 내려와 어천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여전히 경호강은 물소리로 우리를 반긴다.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트레킹 온 사람들도 마을이 시끄럽다.
숙박을 정하려고 몇 군에 알아보니 가격이 맞지 않다. 거의 팬션을 운영하며 트레킹이나 가족끼리 여행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우리 같이 오손도손 온 사람들은 맞지 않다. 고민하다가 휴대폰으로 수철마을 숙박을 검색해본다.
다시 수철마을로!
수철마을 이장님 연락처가 눈에 띈다. 전화해보니 2명 숙박과 식사 준비해주신다고 하신다. 택시를 불러 몸을 태웠다. 이제 끝났다는 안도(?)와 약간의 뿌듯함으로 온 길을 되짚어 수철마을로 돌아간다. 택시로 15분~20분 정도 걸릴 거리를 오순도순 걸으며 하루종일을 보냈다. 그렇지만 아깝지도 않고 바보 같지도 않다. 오히려 뿌듯함과 설레임이 강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수철마을 이장님의 전화다. 마을에 도착하면 주차장에서 기다릴테니 주차장으로 오라고 하신다. 마을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장님이 차를 데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인사를 나누고 이내 이장님의 소개가 시작된다. 아이쿠 반갑습니다. 내가 1박 2일 이수근하고 같이 촬영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마을 이장입니다. 아! 그러세요! 우리집이 찾기가 힘들어서. 예약안하고 온 사람들 때문에 골치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방하고 식사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장님댁은 산으로 약간 올라간다. 누가봐도 지은지 얼마안된 산길따라 팬션이 나타나고, 옆집에 차를 세우신다. 여기에요. 할머니 한 분이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방은 여기고, 화장실은 여기고 푹 쉬다 가세요! 하고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신다. 할머니도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신다.
팬션 주위에는 녹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과 논, 밭이 어우러져 있다. 하루종일 걷느라 지친 몸과 발을 시원한 물로 씻어주고 할머니가 정성스레 준비해주신 밥상에 앉았다. 콩과 오이무침, 구수한 된장국, 할머니가 직접 키우신 맛있는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밥과 함께 입에 집어넣는다.
아! 정말 이거야. 화려하지도 갖춰지지도 않았지만 밥맛이 꿀맛이다. 2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나니 밤이 깊어진다. 여전히 이장님댁은 트레킹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산청의 밤하늘이 문득 보고 싶어진다. 아쉽게도 날씨가 흐려 별은 몇 개 안 보인다. 하지만 공기와 개구리소리 물소리에 내가 다른 곳에 와 있음을 느낀다.
몸이 고단하지만 차곡차곡 하나 버릴 것 없는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뿌듯하다. 잠깐 상상하듯 눈을 감았는데 이내 잠들었나 보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계획 없이 편하게 짐을 꾸려 다녀온 여행에 아직도 내 마음은 설렌다. 그리고 유쾌하신 이장님과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어진다. 다시 계획없이 떠나 볼까?
* 지리산 둘레길 수철-어천 코스는 약 5시간 코스다. 길 중간중간에 간식거리를 사 먹을 만한 가게가 없다. 간단한 간식과 물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나는 2리터짜리 생수를 얼려서 수건에 싸 갔다. 한번에 녹지도 않고 두고 두고 먹을 수 있었다.
* 내리한밭으로 들어서는 시멘트 길은 옆으로 경호강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트레킹 시즌인 요즘은 차들이 너무 빨리 달려 위험하다. 이길에 들어서면 차를 조심하고 길 한쪽에 붙어서 걸어야 한다.
* 숙박은 어천보다는 수철마을이 좋다. 무엇보다 인심좋고 유쾌하신 강수성 이장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이점이다.(강수성 이장님이 운영하시는 네이버 카페)
* 우리는 계획없이 떠나 숙박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봄이나 가을에는 예약이 필수다. 특히 여름에도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숙박 예약이 필요하다. (지리산 숲길, 지리산 둘레길 사이트)
* 강수성 이장님이 직접 운영하시는 산길따라 팬션과 바로 옆집 할머니 민박은 아주 좋다. 강추~
* 지리산 둘레길은 코스마다 이정표가 잘 정리되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방향치거나 현재의 위치를 대충이라도 알고 싶다면, 휴대폰에 지도를 넣어가지고 가면 좋다. 요즘 대부분 스마트폰을 사용하니 지리산 둘레길을 소개하는 네이버카페나 지리산 둘레길 사이트에서 지도를 다운받아(jpg,gif,pdf로 제공하니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다) 휴대폰에 넣어두면 여행시에 도움이 된다.
* 1박 2일에 소개된 이후 팬션이나 민박이 많이 생겼다. 새로 지은 팬션들은 시설이 모두 잘 갖추어져 있어 큰 문제는 없으나 가정집을 이용한 민박은 간단한 세면도구(수건, 비누, 치약, 칫솔, 샴푸 등)이 필요하다.
여행은 계획없이, 생각이 들었을 때 짐을 싸서 떠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을지 무엇을 볼 지 막연한 기대감과 자기도 모르게 떠 오르는 두려움에 마주설 때, 그리고 기대감과 두려움이 한번에 교차될 때의 쾌감을 느끼고 싶어서 인지 모른다.
이번 지리산 둘레길 여행은 계획도 없었고, 한번의 주저함도 없었다. 얼마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저없이 떠났다.
7월 23일(토) 새벽 2시 30분, 한참 자야 할 시간에 주섬주섬 일어났다. 짐도 챙기고, 그동안 묵혀놓고 못 입었던 등산복도 꺼냈다. 지리산 둘레길을 간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코스일지, 어디로 갈 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짐을 챙겨 집을 떠난다.
새벽길을 걸으며, 문득 한참 조사 다닐때가 생각났다. 목적지만 알고,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새벽에 집을 나와 차에 몸을 실었던 그때. 때로는 어르신의 재밌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때로는 너무나 시시하게 다시 돌아와야 했던 그때는 나도 모르는 뭔가에 씌인듯 자꾸 떠나고 떠나고 떠났다.
대학원을 마치고, 직장생활 5년차에 목적지만 알고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은 없어졌고, 혼자 떠나고 싶어도 어딘지 모르게 스물스물 올라오는 두려움에 마음을 억누르고 억눌렀다.
차를 몰아 지인과 약속한 장소에 다다랐다. 이제 출발! 지인은 경남 산청을 목적지로 말한다. 다행히 1박 2일 때문에 유명세를 탄 지리산 둘레길이 네비게이션에 나온다.
새벽이 차츰 걷히는 서울을 벗어나 아래로 아래로 차를 몬다. 모든 것이 아직 조용한 시간. 나와 지인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만 들린다. 한참을 달려 주위에 빌딩보다 산과 나무와 들판이 많이 보이고 이내 산이 높아질 무렵 경남 산청군 수철마을에 도착했다. 아침 8시. 농촌의 아침은 새벽부터 시작되지만, 아직 마을은 조용하다.
자! 이제 걸어볼까?
쥐죽은듯 조용한 마을에 도착하여 짐을 챙겨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섰다. 현재 우리 위치를 확인하고 자! 이제 걸어볼까? 이제 시작한다. 두려움과 설레임이 함께 교차하며 마을을 들어선다. 아침 일찍 부터 나와 있던 마을 어르신이 말을 건다. 이쪽으로 가심 됩니다~ 어디서 오셨는겨? 서울에서 왔습니다. 방금 서울에서 오신 두 분 이쪽으로 넘어 갔습니다. 이쪽으로 가심 됩니더! 아! 감사합니다.
방향을 잡고 길을 걷는다. 논에 벼들은 여름이 깊어짐에 녹색으로 물들었고, 졸졸 거리는 시냇물이 귀를 간지럽힌다. 논과 논 사이 길을 걸어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이웃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주위에 산 밖에 없는 마을은 산 아래 아늑한 곳에 푹 들어앉아 아침을 맞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녹색. 들리는 것은 졸졸거리는 시냇물. 다시 길을 재촉한다. 제법 오래된 나무가 낭떠러지에서 아슬아슬하게 뻗어 땅을 굽어보고 마치 대문을 형성한 듯 우리를 맞이한다.
길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도시에서 들리던 경적소리, 싸이렌 소리보다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편하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길을 걸으며, 이것은 콩, 이것은 호박, 이것은 옥수수. 논 과 논 사이 그리고 논이 들어앉은 비탈면에도 콩을 심어놨다. 참! 어르신들 부지런하시다. 논두렁도 비탈면도 가만 두지 않으셨다. 콩으로 옥수수로 면을 채웠다. 주위에 가파른 산 밖에 없는 이곳에서 땅 한데기가 얼마나 소중하며, 먹을거리가 얼마나 소중할 것인가. 이미 비탈면에 심어놓은 콩과 옥수수가 생명과 삶의 소중함을 넌지시 얘기한다.
한참을 걸어 현재 위치를 살펴보니 평촌리와 대장마을 사이인 듯 하다. 배낭을 벗고 정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걸었더니 발바닥이 뜨겁다. 살살 녹은 얼음물에 목을 축이고, 공기를 들이 마신다.
햇볕이 나지만 구름에 가려있고, 산들바람이 시원하여 걷기 참 좋다. 땀이 좀 마를 무렵.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재촉한다. 약간 구릉진 곳에 위치한 마을을 벗어나자 이내 도로가 보이고 졸졸거리던 시냇물이 이내 물소리를 높인다.
경호강이 눈에 들어온다. 강변에 텐트를 치고, 트래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인다. 길은 경호강을 옆에 두고 우리를 안내한다. 물소리는 갈수록 깊어지고, 이내 큰 강을 만나 소리를 낮춘다.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질 무렵, 옆으로 트레킹과 펜션들이 보이고 이내 도로가 나온다. 잠깐 동안 이 길이 맞나 하고 헷갈릴 무렵 도로 표지판을 보고 방향을 잡는다.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건너 내리로 들어서는 길. 도로가 한참 이어진다. 강은 계속 우리를 옆에 두고 따라온다. 도로는 트레킹 보트를 나르는 차들, 트레킹을 즐기로 온 사람들을 나르는 차들로 정신이 없고, 강에서는 구호 소리와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함께 즐긴다. 재밌겠다. 우와 저거봐! 한참을 바라보다가 길을 재촉한다. 도로에서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고 강은 아까보다 더 가까워진다. 여전히 트래킹하는 사람들도 강은 쉴새가 없지만, 강물소리는 여전히 즐겁다. 강을 두고 걸어걸어 내리한밭으로 들어서기전 자그마한 컨테이너 박스 매점이 눈에 뛴다. 잘됐다. 쉬고 가자. 매점에 들어서 일단 점심 겸 찌지미와 막걸리를 시킨다. 매점을 지키는 젊은 아가씨 둘이 정신이 없다. 트레킹 하러 온 사람들이 들락날락 들락날락!
지인과 마주보고 앉아 막걸리 한 사발을 기울인다. 이것저것 그리고 오늘 걸은 길도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한다. 이내 막걸리 한 주전자에 두부 김치 추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것도 좋다! 어차피 계획도 없었다. 이 순간을 즐기자.
언뜻 취기가 올라오고 혀가 꼬이려는 찰라! 시간을 확인하고 짐을 챙긴다. 자 다시 길을 재촉하자. 컨테이너 매점에서 나와 다시 방향을 잡는다. 여전히 강은 우리 곁을 흐르고 방향을 잡아 들어서니 산길이 나온다. 오랫동안 아스팔트와 시맨트 바닥만 걷다보니 반갑기도 하지만 다시 시멘트 바닥이 나온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고즈넉히 바라본다
입에서는 막걸리 두 주전자에 트름으 나오고 여전히 강쪽에서는 트레킹 온 사람들의 구호소리가 메아리 친다. 내리한밭을 넘어 바람재를 넘었을까? 아! 보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작지만 아늑한 계곡!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발을 벗고 계곡에 발을 담근다. 이내 찌릿한 차가움이 가슴을 찌른다. 계곡에 발 담궈 본 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계곡 물 소리에 취하고 찌릿한 계곡물에 취하고 살랑살랑한 숲 바람에 취해 고즈넉히 아무말 없이 계곡에 잠긴 발을 응시한다.
시원하다. 좋다. 좋은 말만 나온다. 담궜던 발을 햇볕에 천연 온돌이 된 바위에 찍어 말리고 주섬주섬 신발을 신는다. 뜨거워졌던 발이 이내 시원해지고 한결 걷기가 편해진다. 풍현마을로 들어선다. 흙길과 시멘트길이 나타나고 없어지고 걷고 걷다가 고즈넉히 들어 앉은 대나무 숲을 만났다. 그리고 이내 대나무숲과 숲 사이에 푹 들어앉은 논이 눈에 들어온다.
야! 정말 이 논 좋다. 어쩜 이렇게 아늑하게 들어 앉았을까? 이 논 주인이 참 부럽네 하고 감탄에 감탄을 쏟아낸다. 너무 포근하게 들어앉아 있어 일을 해도 피곤할 것 같지 않은 그 논을 못내 아쉬어하며 뒤로 하고 내려서니 다시 길이 넓어진다. 넓은 시멘트길이 나타나고 경호강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지만 물소리와 트레킹 구호소리는 끊임없다.
한참을 걸으니 비가 후두둑! 어이쿠! 이럴줄 알았다 하는 순간 비가 멈춘다. 마치 옆 집에서 물을 뿌렸는데 잠깐 물이 튄 정도 비가 내린 것. 참 웃기네. 길을 걸어서 아침재 입구로 들어선다. 이제 숲길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 숲길을 벗어나면 어천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컨테이너 매점에서 3시간을 노닥거리다 보니 아침재 입구에 들어선 시간이 5시. 급하게 길을 재촉한다. 산길이 그리 험할것 같지는 않지만 막걸리 두 주전자에 무거운 발에 땀이 후두둑 떨어진다. 산길은 끝날 듯 내려갈듯 다시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진다. 가다 서다를 2~3번 이제 길이 끝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산길을 내려와 어천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여전히 경호강은 물소리로 우리를 반긴다.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트레킹 온 사람들도 마을이 시끄럽다.
숙박을 정하려고 몇 군에 알아보니 가격이 맞지 않다. 거의 팬션을 운영하며 트레킹이나 가족끼리 여행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우리 같이 오손도손 온 사람들은 맞지 않다. 고민하다가 휴대폰으로 수철마을 숙박을 검색해본다.
다시 수철마을로!
수철마을 이장님 연락처가 눈에 띈다. 전화해보니 2명 숙박과 식사 준비해주신다고 하신다. 택시를 불러 몸을 태웠다. 이제 끝났다는 안도(?)와 약간의 뿌듯함으로 온 길을 되짚어 수철마을로 돌아간다. 택시로 15분~20분 정도 걸릴 거리를 오순도순 걸으며 하루종일을 보냈다. 그렇지만 아깝지도 않고 바보 같지도 않다. 오히려 뿌듯함과 설레임이 강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수철마을 이장님의 전화다. 마을에 도착하면 주차장에서 기다릴테니 주차장으로 오라고 하신다. 마을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장님이 차를 데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인사를 나누고 이내 이장님의 소개가 시작된다. 아이쿠 반갑습니다. 내가 1박 2일 이수근하고 같이 촬영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마을 이장입니다. 아! 그러세요! 우리집이 찾기가 힘들어서. 예약안하고 온 사람들 때문에 골치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방하고 식사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장님댁은 산으로 약간 올라간다. 누가봐도 지은지 얼마안된 산길따라 팬션이 나타나고, 옆집에 차를 세우신다. 여기에요. 할머니 한 분이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방은 여기고, 화장실은 여기고 푹 쉬다 가세요! 하고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신다. 할머니도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신다.
팬션 주위에는 녹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과 논, 밭이 어우러져 있다. 하루종일 걷느라 지친 몸과 발을 시원한 물로 씻어주고 할머니가 정성스레 준비해주신 밥상에 앉았다. 콩과 오이무침, 구수한 된장국, 할머니가 직접 키우신 맛있는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밥과 함께 입에 집어넣는다.
아! 정말 이거야. 화려하지도 갖춰지지도 않았지만 밥맛이 꿀맛이다. 2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나니 밤이 깊어진다. 여전히 이장님댁은 트레킹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산청의 밤하늘이 문득 보고 싶어진다. 아쉽게도 날씨가 흐려 별은 몇 개 안 보인다. 하지만 공기와 개구리소리 물소리에 내가 다른 곳에 와 있음을 느낀다.
몸이 고단하지만 차곡차곡 하나 버릴 것 없는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뿌듯하다. 잠깐 상상하듯 눈을 감았는데 이내 잠들었나 보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계획 없이 편하게 짐을 꾸려 다녀온 여행에 아직도 내 마음은 설렌다. 그리고 유쾌하신 이장님과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어진다. 다시 계획없이 떠나 볼까?
* 지리산 둘레길 수철-어천 코스는 약 5시간 코스다. 길 중간중간에 간식거리를 사 먹을 만한 가게가 없다. 간단한 간식과 물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나는 2리터짜리 생수를 얼려서 수건에 싸 갔다. 한번에 녹지도 않고 두고 두고 먹을 수 있었다.
* 내리한밭으로 들어서는 시멘트 길은 옆으로 경호강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트레킹 시즌인 요즘은 차들이 너무 빨리 달려 위험하다. 이길에 들어서면 차를 조심하고 길 한쪽에 붙어서 걸어야 한다.
* 숙박은 어천보다는 수철마을이 좋다. 무엇보다 인심좋고 유쾌하신 강수성 이장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이점이다.(강수성 이장님이 운영하시는 네이버 카페)
* 우리는 계획없이 떠나 숙박 예약을 하지 않았지만, 봄이나 가을에는 예약이 필수다. 특히 여름에도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숙박 예약이 필요하다. (지리산 숲길, 지리산 둘레길 사이트)
* 강수성 이장님이 직접 운영하시는 산길따라 팬션과 바로 옆집 할머니 민박은 아주 좋다. 강추~
* 지리산 둘레길은 코스마다 이정표가 잘 정리되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방향치거나 현재의 위치를 대충이라도 알고 싶다면, 휴대폰에 지도를 넣어가지고 가면 좋다. 요즘 대부분 스마트폰을 사용하니 지리산 둘레길을 소개하는 네이버카페나 지리산 둘레길 사이트에서 지도를 다운받아(jpg,gif,pdf로 제공하니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다) 휴대폰에 넣어두면 여행시에 도움이 된다.
* 1박 2일에 소개된 이후 팬션이나 민박이 많이 생겼다. 새로 지은 팬션들은 시설이 모두 잘 갖추어져 있어 큰 문제는 없으나 가정집을 이용한 민박은 간단한 세면도구(수건, 비누, 치약, 칫솔, 샴푸 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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